진여 眞如 建成의불교공부

열째, 업자재등소의진여業自在等所依眞如란 이 진여眞如를 깨달은證 후에 일체一切 신통神通의 지혜를 일으켜 다라니문과 삼매문作業多羅尼定門에서 다 널리 자재를 얻기 때문이라. 아홉째, 상대진여相待眞如와 절대진여絶待眞如로서 이는 위의 안립진여安立眞如와 비안립진여非安立眞如의 다른 이름이니, 『화엄대소초華嚴大疏鈔』의 말한 바이니라. 셋째, 무기법진여無記法眞如란 진여眞如가 인연緣 따라 무기법無記法을 이룬 진여眞如니 이 삼진여三眞如는 『잡집론雜集論』에 나옴이니라.

  • 여래장은 중생은 누구나 ‘여래(부처, 깨달은 사람)’가 될 수 있는 씨앗, 종자, 속성,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다는 뜻으로 주체적인 모양이 없다는 말입니다.
  • 누구나 마음의 번뇌를 없애 버리면(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 나온 말이다.
  • 알아차림이 익어지면 습관적인 흡연, 음주, 마약까지도 다 끊을 수 있습니다.
  • 좀 더 달리 쉽게 말한다면, 근심, 걱정, 증오, 욕망 등이 없는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대상 경계도 마음이라고 했을 때 내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주객이 나눠지는 건데 모든 게 한마음이라면 주객이 없는 거예요. 진여가 일심, 한마음인데, 이 한마음이 주관과 객관이 본래 없는 거죠. 그래서 수행을 하려면 당연히 주관과 객관을 두면 안 되는 거죠.

불교경전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마음(心)이기 때문에 진여자성을 말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여자성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는 주로 허공, 바다와 파도, 거울,등이 있습니다. 전문詮門에 요약한 뜻을 설명으로서 칠진여七眞如를 설說하나, 설명을 폐廢하고 진여如의 본체體를 논論하면 일곱이 곧七卽 하나一如니라. 오늘은 진여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언어를 통해서 해석을 해보는 이언진여(離言眞如), 말을 떠난 진여에 대한 얘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진여를 체(體), 언(言), 상(相)으로 얘기한다 했는데, 이 중에서 두 번째 언(言)을 이언진여(離言眞如)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대상도 마음이고 보는 것도 마음인데 주관과 객관을 두지 않는 방법은 뭐냐 하면, 진여 자리에 들어가는 세 가지 중에 세 번째‘처(處)가 없다’는 겁니다. 우선 정관(正觀)에는 정념(正念)이 들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알아차림, 두 번째, 대상에 끄달려 가지 않음, 세 번째는 마음을 챙김, 네 번째는 깨어 있음, 이 네 가지 뜻이 정념 안에 있습니다. 보고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냥 고정되어 있는 사물은 캐치가 잘되기 때문에 그냥‘안다’, 이렇게 되고 빠르게 변하는 것은 정신을 잘 가다듬어서 알아차려야 캐치가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이 변하는 것을 잘 알아차리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참나’의 한자어가 진아(眞我)이며, ‘참나’는 진아(眞我)의 번역어이다.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가 번성하면서 수행의 목표가 진아(眞我),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眞如), 불성(佛性)의 발견에 모아지면서 관심의 대상이 된 말이다. 노장사상의 진인(眞人)의 개념이 불교에 수용된 듯하다. 진여(眞如, skt. 타타타/tathata)란 불교에서는 ‘진리’에 해당하는 말이다.

여기서 먹는 것을 중지하면 스스로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호법 논사는 이 세 가지 를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증자증분의 개념을 추가합니다. 자증분의 자가 치유 능력이 한 부분에 해당한다면 증자증분은 전체 시스템에서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낙동강의 원천을 알아 보니 태백시 매동산 너덜샘에서 발원하여 황지연못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이 흘러 흘러 제 7식을 만들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에게는 큰 강과 같이 수많은 업들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리야식 속에는 그 불각을 때뜨리려는 각(覺)의 힘이 있는 것이니, 환멸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아리야식은 깨달음을 위한 주체(主體)가 된다. 진여자성의 본바탕 속에는 두 종류의 작용이 있다. 하나는 자성 본래의 작용이고, 또 하나는 인연에 따라 반응하는 작용이다. 그런데 인연에 따라 반응하는 작용에 집중할 뿐, 자성 본래의 작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진여불성이란 “좋다 궂다, 많다 적다, 그러한 상대적 개념으로 있는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자비, 지혜, 능력, 행복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본래 성품(본성)을 말하며, 마음은 인간의 마음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한 그 무엇, 즉 진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불교 경전과 논서에서는 진여자성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승불교 경전에서는 진여자성을 깨닫는 것이 중생의 고통을 해탈하는 길이라고 강조합니다.

제20강 진여(眞如)라는 이름을 풀이함

이 가운데 안혜 논사와 호법 논사의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3세 가운데 능견상, 경계상은 업상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안혜 논사는 일분 즉,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빅뱅 이후 우주가 생겨났다고 이야기하듯이 처음 분리되기 이전의 점을 업상 이라고 합니다. 난타 논사는 객관과 주관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상태에 주목했기 때문에 견분, 상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진나 논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견분과 상분 사이에서 둘을 조정, 관리하는 자증분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무언가를 먹어도 낫지 않는 경우가 있습 니다.

세상은 나와 나 이외의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를 주체로 할 때는 주, 견, 능이고 대상을 주체로 할 때는 객, 상, 소가 됩니다. 어느 학문을 하건 주체와 객체의 개념은 다 같습니다.

진여자성은 불교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이다. 이는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본질을 나타내며,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글에서는 진여자성의 의미와 그 중요성,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따라서, 진여자성을 깨닫는 것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평화와 조화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명상과 수행, 경전 공부, 스승의 https://bauhutte-g.com/kr-57 가르침을 통해 진여자성에 다가가고, 이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말과 생각을 떠났다면, 진여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거죠. 마치 방향을 잃은 혼미한 사람은, 방향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란스런 것과 같으니,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Buddhism 불교에 대한 정보 공유

유식에서는 안혜 논사, 난타 논사, 진나 논사, 호법 논사의 견해를 통해 아뢰야식을 어떻게 분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혜 논사는 아뢰야식을 일분(견분) 하나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난타 논사는 아뢰야식을 견분, 상분이라고 주장했고, 진나 논사는 아뢰야식을 견분, 상분, 자증분이라고 설명했고, 호법 논사 는 견분, 상분, 자증분, 증자증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연애하다가 애인이 변심하면 전화도 안 받고 만나주지도 안잖아요. 그렇게 되니까 두 번째, 대상에 끄달려 가지 않는다 이거죠. 대상에 따라가지 않으니까 내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보호가 되는 거죠. 이렇게 마음을 챙기고 있으니까 네 번쩨, 의식이 깨어나는 거예요. 이 깨어 있음의 특징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안다 이겁니다. 말을 하면 말을 하는 줄 알고, 생각하면 생각하는 줄 알고, 걸어가면 걸어가는 줄 알면서 걸어간다는 겁니다.

불각(不覺)의 뜻은 진여법(일심)이 하나 임을 여실히 알지 못해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망념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지만, 방향을 잃은 사람은 혼미하게 된다.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각(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지만,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의면 불각은 없어지게 된다.” 무명에 물들면 불각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망념이란 이 무명에 의해 일어나는 생각들입니다. 이것들이 진여의 세계에서 불각의 세계로 넘어오게 만듭니다.